증권가에서 애널리스트가 리서치를 떠나고 있다. 장기적으로 금융 R&D가 무너진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 퀀트(계량)분석에서 최고 애널리스트로 꼽히는 이원선 KDB대우증권 부장은 지난 10월 명함을 바꿨다. 국내 대표 운용사인 트러스톤자산운용의 리서치 부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 이 부본부장은 1994년 대우경제연구소를 시작으로 ING베어링증권, KDB대우증권을 거쳐 2011년 여성 최초로 토러스투자증권 리서치헤드까지 역임했던 스타 애널리스트다. 그는 지난해 친정 격인 KDB대우증권으로 컴백했지만 결국 리서치센터를 떠났다.
# A증권사 투자전략 담당 RA(Research Assistant·보조 애널리스트)였던 박 모 씨는 3년간의 리서치 생활을 마치고 B증권사 IB(잠깐용어 참조)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좋은 연봉으로 스카우트된 것이 아니다. 리서치 애널리스트가 비전이 없다고 판단해 ‘일단 탈출(?)’한 것이다.
증권가의 꽃으로 불리던 리서치 애널리스트들의 엑소더스(Exodus) 현상이 심각하다. 고액 연봉을 받아온 스타 애널리스트부터 RA까지 전방위로 리서치를 떠나고 있다. 주로 운용사 등 바이사이드(Buy side, 잠깐용어 참조)로 이동하는 가운데 증권사 내 다른 부서로 옮기거나 아예 여의도를 떠나 기업으로 옮기는 사례도 늘었다.
리서치센터장의 자리 이동부터 심상치 않다. 황상연 전 미래에셋증권 센터장은 알리안츠자산운용 주식운용 총괄상무로 이직했다. 황 상무는 제약·화학부문 베스트 애널리스트로 명성이 자자했다. 1970년생으로 2008년 당시 미래에셋증권 최연소 센터장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최근 1년간 미국 연수를 다녀온 그는 리서치를 기반으로 중소형주를 발굴하겠다는 알리안츠운용의 스카우트 요청을 받아들였다. 최석원 전 한화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지난 8월 메리츠화재 자산운용 팀장으로 옮겼고 문기훈 전 신한금융투자 리서치센터장도 신협중앙회 운용담당 CIO로 이직했다.
애널리스트나 RA급으로 내려가면 리서치 공동화(空洞化) 현상은 더 심각해진다.
삼성증권은 2011년 한때 104명의 애널리스트를 보유했으나 현재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인터넷·게임부문 베스트 애널리스트로 자신만의 분석 방법과 논리로 호평이 자자했던 박재석 전 삼성증권 이사는 올해 초 게임업체 ‘네시삼십삼분’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주회사·미디어·제약부문은 아예 애널리스트가 공석이다.
운용사로 옮기거나 아예 증권업 떠나
리서치가 분석 대신 영업 매달리기도
현대증권의 경우 지난 3월 리서치센터 축소 개편 당시 애널리스트 수가 30여명으로 줄었다. 현대증권은 4부 15개 팀 체제로 운영되던 리서치센터를 부서 없이 센터 직속 10개 팀으로 쪼그라뜨렸다. 이때 리서치센터를 떠난 애널리스트들은 다른 업무에 배치되거나 아예 퇴사했다. 유안타증권(옛 동양증권) 역시 구조조정에 애널리스트 10여명이 이탈했다.
중소형사는 더 심하다. KTB투자증권은 분석 기업이 가장 많고 좋은 종목을 잘 발굴하는 리서치로 유명했다. 그러나 증권가 최고 불황이라는 이 시기에 인력 감소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2012년 60명대였던 조직이 2013년 36명(애널리스트 20명·RA 12명·지원 4명)으로 크게 줄었다. 올해에도 6명이 또 빠져나갔다. 일부 운용사로 자리를 옮겼고 음식료담당 애널리스트는 아예 여의도를 떠났다. 과거 30명 이상의 리서치를 꾸려 왔던 한화투자증권은 보고서를 내는 ‘라이팅(Writing) 애널리스트’ 숫자가 한 자리로 떨어졌다. C증권사는 매경 베스트 애널리스트 평가 대상인 36개 부문 가운데 10개도 채우지 못할 만큼 애널리스트 기근에 시달린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10대 증권사 중 7곳이 연초 대비 적게는 1명에서 많게는 22명까지 애널리스트 수가 감소했다.
애널리스트들이 리서치센터를 떠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무엇보다 업무량에 비해 급여가 급격히 추락했다. 애널리스트 업무 강도는 증권가에서도 ‘살인적’이기로 악명 높다.
좋은 기업을 발굴해 분석하고 경제를 예측하는 보고서를 내는 업무는 기본 중 기본이다. 또 다른 주요 업무가 매니저 대상 프레젠테이션(PT)인데 최근 PT 횟수가 급증했다. 한 대형 증권사의 경우 기관투자가 대상 외부 설명회가 3년 전 연간 2900회에서 지난해 3900회로 증가했다. 증권사들이 다양한 수익 모델을 찾는 과정에서 법인뿐 아니라 개인 고객을 찾아다니고 IPO(기업공개) 등 IB 업무까지 깊이 관여한다.
반면 연봉은 크게 줄었다. 대체로 최근 3년간 평균 20∼30% 삭감됐다고 전해진다. 애널리스트들은 “고액 연봉은 옛날 얘기고 구조조정당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판”이라고 입을 모은다. 연봉 감소를 감내하고 증권사 안에서 일반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사례도 크게 늘었다.
지난해 CJ E&M 사태가 불거진 이후 애널리스트 위상이 떨어진 것도 엑소더스 현상과 관련 깊다. CJ E&M 사태는 기업 IR담당자가 일부 애널리스트에게 미리 실적 정보를 공개했다 징계를 받은 사건이다. 이 일 이후 기업 IR담당자나 애널리스트가 몸 사리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IR담당자가 주는 자료를 정리하는 수준의 ‘그저 그런’ 보고서가 판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애널리스트가 떼 지어 기업을 방문하고 차별화되지 않은 보고서 5~6개를 쏟아낸다”며 “분석 능력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업의 본질을 망각한 것”이라며 일침을 가했다.
증시가 박스권에 갇혀 종목 발굴이 쉽지 않아졌다는 점도 애널리스트 위상을 낮춘 요인으로 꼽힌다. 시장이 어려워지면서 주식 약정을 주는 ‘갑’의 위치를 악용하는 펀드매니저가 늘어난 것도 애널리스트 자존심을 떨어뜨린 요인으로 제기된다.
증권가에선 애널리스트 이탈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리서치센터는 금융R&D(연구개발)와 같은데 애널리스트 이탈이 결국 제조업의 R&D 인력이 빠져나가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당장 비용이 들어간다고 투자에 소홀했다 증권사 경쟁력이 훼손될 수 있다는 얘기다. 또 당장은 비용부서로 찬밥 신세지만 증시가 살아나면 애널리스트 품귀 현상에 증권가가 또 한 번 술렁일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 중견 애널리스트는 “증권사는 실적이 나빠지면 리서치센터부터 구조조정한다. 그러다 막상 분위기가 좋아지면 급작스레 리서치를 강화한다고 호들갑을 떤다. 제대로 된 리서치 없이 증권사가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애널리스트 숫자가 감소하고 분석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업계 전체로 봤을 때 큰 손실이다. 증권사들은 불황이라 해도 기업 분석에 소홀하지 말아야 하며 애널리스트들도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더 분석에 매달려야 한다”고 말했다.
애널리스트 전성기 다시 올까
자산 배분 전략 애널리스트 뜰 듯
지금과 같이 리서치센터 체계가 갖춰지고 애널리스트 업무가 분화된 건 1996~1997년이다. 외환위기 직후 스티브 마빈 쌍용증권(현 신한금융투자) 이사가 외국계 증권사의 조직 체계와 분석 틀을 가져오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매경이코노미는 이에 앞선 1996년부터 리서치센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베스트 애널리스트 선정 작업을 시작했다.
외환위기 전까지 리서치센터는 투자분석실 또는 투자전략실로 불렸고, 업종 특화 애널리스트도 없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리서치센터 아래 시장 전체 흐름을 살피는 투자전략팀과 특정 분야를 담당하는 섹터별 기업분석팀으로 나뉘었다.
전성기는 2001~2007년이다. 미국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금융위기 직전까지 500에 머물던 코스피지수가 1000을 넘어 2000까지 올랐다. 리포트가 나오면 주가도 즉각 반응해 애널리스트들은 황금기를 누렸고 연봉도 치솟았다.
금융위기 이후 바뀐 환경 아래서 애널리스트 전성기가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앞으로는 기업 분석과 함께 글로벌 자산 배분 전략을 세우는 애널리스트가 주목받을 듯 보인다. 한국이 저성장에 접어들고 주식시장도 큰 폭의 상승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투자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 각 증권사들은 글로벌 투자전략·자산 배분 애널리스트를 강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잠깐용어 *IB(투자은행)
자금이 필요한 기업과 투자자를 연결시켜주는 기능을 말한다.
잠깐용어 *바이사이드(Buy side)와 셀사이드(Sell side)
바이사이드는 사는 쪽이라는 의미로 자산운용사나 자문사 등을 말한다. 셀사이드는 파는 쪽으로 증권사다. 운용사가 증권사를 골라 주식 약정을 주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운용사는 대체로 리서치 능력을 보고 증권사를 평가한다.
매경이코노미 2014.11.19 [명순영 기자 msy@mk.co.kr / 사진 : 윤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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