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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서 부활한 대우경제연구소, 국회의원 네 명 배출......한경비즈니스

여의도서 부활한 대우경제연구소, 국회의원 네 명 배출…친박 핵심 떠올라

19대 국회 새 입법부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 가운데 ‘대우경제연구소’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대우경제연구소 출신 4인방이 19대 국회에 진출, 활약하고 있어서다. 새누리당 원내 사령탑인 이한구 의원을 비롯해 3선인 정희수(경북 영천) 의원, 초선인 안종범(비례대표) 의원과 강석훈(서울 서초을) 의원이 그 주인공이다. 대우경제연구소는 1999년 해체되고 없지만 13년 만에 연구소 선후배가 여의도에서 금배지를 달고 만난 것이다. 한 조직 출신 4인이 동시에 의원이 되는 일도 어렵거니와 모두 새누리당이자 친박(친박근혜)계로 분류된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국회 내 ‘경제통’ 급부상

대우경제연구소는 1984년 국내 첫 민간 경제 연구소로 설립돼 1990년대 말까지 경제·산업 연구 및 예측, 정책 제언 등에 앞장서며 민간 ‘싱크탱크’ 역할을 해왔다. 많게는 150명 직원을 자랑하는 당시 최대 민간 연구소였다. 이 원내대표는 1987년부터 대우경제연구소장을 맡아 1998년 대표이사 사장까지 지낸 명실상부한 연구소 수장이었고 그 아래에 지방산업팀장을 맡은 정 의원, 재정팀장을 맡은 안 의원, 금융팀장을 맡은 강 의원이 있었다. 소장을 제외하면 정 의원이 최고참이고 강 의원이 막내였다.

한솥밥을 먹다가 흩어진 것은 1999년을 전후해서다.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가자 대우경제연구소도 해체 수순을 밟았고 연구 인력은 금융, 학계, 타 연구소, 일반 제조업 분야 등으로 흩어진 것. 이 원내대표는 16대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했고 정 의원은 타 민간 연구소인 백상경제연구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 의원은 한국조세연구원을 거쳐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가 됐고 강 의원은 곧바로 성신여대 경제학과로 옮겼다.

다른 길을 걸어 온 대우맨 4인방은 2012년 19대 국회에서 다시 만나 또 한 번 같은 직함을 갖게 됐다. 국회 입성 시기는 조금씩 다르다. 이 원내대표는 단국대로 발령 난 상태에서 2000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요청을 받고 입당 후 비례대표로 등원했다.

정 의원이 정치권에 발을 내디딘 것은 2005년 4·30 재·보선 때로 박근혜 전 비상비대위원장의 전폭적인 지원 유세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안 의원과 이 의원은 학계에 있다가 나란히 19대 국회에 입성했다. 안 의원은 박 전 위원장 바로 뒤 번호인 비례대표 12번이었고 강 의원은 비례대표 제안을 받은 후 다시 지역구에 전략 공천돼 60% 득표율로 당선됐다.

공통점은 모두 새누리당 경제통으로 박 전 위원장의 ‘경제 참모’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이 원내대표는 박 전 위원장의 ‘경제 교사’로 불렸다. 정 의원은 박 전 위원장과 정기적으로 경제정책에 관해 토론하기 위해 모임을 가졌고 안 의원과 강 의원은 새롭게 꾸려진 경선 캠프에 합류하며 대선 레이스의 정책 조언자로 활약하게 됐다.

안 의원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을 전후해 박 전 위원장을 도와 온 ‘5인 공부모임’의 멤버로 재정·복지 분야 핵심 브레인이다. 경선 캠프에서 정책·메시지본부장을 맡았다. 강 의원은 지난해부터 박 전 위원장과 경제 이슈와 당면 과제에 대해 긴밀히 토론하는 등 핵심 경제 브레인으로 떠올랐다. 캠프에서 정책·메시지 부단장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정책위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대우경제연구소 출신이 19대 국회에 진출해 활약하는 배경에는 경제통이 신흥 실세로 부상한 데 있다. 총선 당시 민생의 중심에 ‘경제’가 자리 잡으면서 각 당이 저마다 경제통 후보를 전면에 내세운 것. 18대 국회에 ‘최고경영자(CEO) 바람’이 불었다면 19대 국회에는 경제 관료와 교수, 경제 연구원 출신 등이 두드려졌다. 새누리당 유력 대선 주자인 박 전 위원장 최측근에도 유독 경제 전문가가 많다. 서병수 사무총장은 경제학 박사 출신이며 이혜훈 최고위원도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대우경제연구소 출신이 많은 것은 ‘혹독한 훈련’ 덕이라는 의견도 있다. 대우경제연구소 출신인 신상문 우리투자증권 전무는 “당시 추석·설날을 제외하고 쉬어 본 적이 없다. 새벽 1~2시에 퇴근하면서 다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했다”고 전한다. 매주 토요일마다 열린 토요산업세미나는 연구원 사이에 악명 높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신 전무는 “연구원마다 프레젠테이션하고 내부 직원과 외부 패널들이 질의응답을 하는데 대부분의 연구 주제가 한 번에 통과되는 일이 없어 모두가 진땀을 뺐다. 일종의 품질 관리였다”고 말했다.

또한 대우경제연구소 국회 진출 4인방은 모두 경제학 박사이면서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이 원내대표는 행정고시 합격 후 재정부에서 일한 후 연구소장으로 부임했고 정 의원은 당시 지방자치단체가 생길 무렵 지방 경제 연구를 선구적으로 시작한 지역경제 전문가다. 안 의원은 재정학회 이사와 재정팀장 등을 맡았던 정책통이고 강 의원은 금융정책, 거시경제 등에 강점이 있었다.

당시 함께 일했던 동료는 4인방을 어떻게 기억할까. 대우경제연구소 경영관리부장으로 살림살이를 맡았던 나한엽 대우증권 부장은 이 원내대표를 ‘완벽주의자’로 기억한다. 보고서를 몇 번씩 검토하며 그때마다 빨간 펜으로 도배를 했다고 한다. 용어 하나라도 적확하지 않으면 고칠 때까지 수정하게 해 “엄하기로는 눈물 정도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사원 제도를 연구원 제도로 바꾸거나 해외에 사람을 파견해서라도 장서를 구하는 등 연구원을 전문가 집단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따뜻했다고 말한다.



“힘들었기에 끈끈한 관계였다”

정 의원은 후배들에게는 혹독한 교육을 하는 어려운 선배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안 의원은 소신이 강한 스타일로 외모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후배들을 잘 챙기는 선배였고 강 의원은 82학번으로 연구소에서 막내 박사 격이지만 스마트한 인재로 인정받았다”고 나 부장은 귀띔했다.

도제식 교육으로 주로 후배들이 ‘깨지는’ 상황이었지만 선후배 간 사이는 꽤 돈독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대우경제연구소에는 직급에 관계없이 대등한 관계에서 얘기할 수 있는 토론 문화가 잘 정착돼 있었다. 일례로 2박 3일간 술을 마시며 토론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힘들었기에 돈독하다”고 옛 대우경제연구소 출신들은 전한다.

대우경제연구소는 해체됐지만 아직 OB 모임은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우경제연구소 출신들은 1년에 1~4차례 만나 정기 모임을 갖고 경제 토론회 등을 열며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다.

여의도 4인방 이외에도 대우경제연구소 출신들은 현재 증권업계에 많이 종사하고 있다. 1999년 연구소 해체 후 가장 많은 연구 인력이 이동한 곳도 증권업계, 특히 리서치 분야였다. 대우 출신이 리서치센터장을 맡는 경우가 많아 ‘리서치 사관학교’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신성호(우리)·이종우(솔로몬)·임진균(IBK)·조익재(하이)·최석원(한화)·이원선(토러스) 리서치센터장 등이 주요 증권사에서 일하고 있다.

또한 정유신 한국벤처투자 사장, 김석중 현대인베스트먼트자산운용 사장, 한동주 흥국투신운용 사장, 김영호 트러스톤자산운용 공동대표, 윤희빈 지안리서치 대표, 이철순 와이즈에프엔 사장, 윤재현 파레토투자자문 사장, 이찬우 국민연금기금본부장, 이승주 우리PE대표이사, 나홍규 인피니티투자자문 대표이사 등 도 각자의 분야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한경비즈니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