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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 야그(My job story)

대형증권사 리서치센터의 직무유기?

 

 

 오랫동안 대우증권 리서치센터(구 대우경제연구소)를 애널리스트의 사관학교라 불러왔다. 도제식 교육을 통해 무수히 많은 애널리스트를 양성하고 배출한 결과 거의 대부분 국내 증권사에 대우증권 리서치센터 출신이 진출해 있고 외국계 증권사 리서치센터에서도 대우증권 출신 애널리스트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우증권 출신 현직 리서치센터장이 두자리수에 근접할 정도라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이와 같이 몇 년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우증권을 비롯한 상위권 대형 증권사 리서치센터는 증권시장에서 애널리스트의 공급기지로서 역할을 자의든 타의든 충실히 해 왔다. 그 때는 대형 증권사에서 웬만큼 배운 애널리스트는 좋은 대접을 받으며 중소형 증권사 리서치센터로 옮길 수 있었다. 즉 대형 증권사 리서치센터의 역할 중 하나가 인력양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몇년간 국내 애널리스트 시장은 많이도 변했다. 대형 증권사 리서치센터는 더 이상 애널리스트의 공급기지가 아니라 블랙홀 같이 빨아 들이는 소비자로 바뀌었다. 중소형 증권사가 투자해 키워 놓은 애널리스트를 키운 회사에는 아무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거액의 연봉을 미끼로 빼 가는 것이 다반사가 되어 버렸다.

 

 물론 과거에도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지금 새삼 더 심각하게 거론하는 것은 대형 리서치센터가 자체 양성과 외부 영입을 병행했던 과거와는 달리 자체 양성을 거의 포기해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스카우트가 애널리스트 시장의 유연성을 키워 애널리스트의 몸값을 올리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그 이면의 문제점이 적지 않다.

먼저 애널리스트가 본연의 역할보다 대형 증권사 센터장에게 간택되기 위한 일에 더 공을 들인다는 점이다. 애널리스트는 투자자에게 양질의 리서치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소속 회사의 영업을 지원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신의 몸값과 직결된다고 생각하는 언론사의 베스트 애널리스트 순위에 더 관심을 가지는 애널리스트가 많아지고 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는 대형 증권사의 RA(Research assistant) 적체 문제이다. 대형 증권사에서 RA가 애널리스트로 성장하는 기회가 점차 줄어들어 RA라는 전문 직군이 생길지도 모를 지경이다. 길어도 3년 정도 RA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낸다면 애널리스트로서 길을 열어주어야 하지만 빈자리가 생기면 기다리지 못하고 외부 영입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RA를 처음 채용하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에는 RA는 애널리스트의 이탈이 생길 때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상비군이었다. 그러나 대형 증권사의 위와 같은 행태가 고착되면서 RA는 애널리스트가 되기 위한 기회와 교육을 적절히 받지 못하고 애널리스트를 단순히 보조하는 소모품으로 전락할 지 모른다는 우려가 퍼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대형 증권사는 여기저기서 돈으로 끌어모은 애널리스트로 인해 고유의 색깔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고 틈새시장에서 나름대로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해 오던 중소형 증권사의 존립은 점차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미 짐작하고도 남겠지만 중소형 리서치센터의 고충은 열심히 키운 애널리스트를 제대로 써 먹지도 못하고 대형하우스에 빼앗긴다는 점이다. 애널리스트 본인이야 좋은 몸값을 받고 가니 좋겠지만 회사는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고객에 대한 안정적인 리서치서비스를 할 수 없게 되어 고객 신뢰라는 중요한 자산을 잃을 수도 있다.

 

 요즘 대형 리서치센터의 애널리스트 채용 행태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얼마 전 대형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이 다른 대형 증권사로 옮기면서 중형 증권사 리서치센터에 비상이 걸렸다강력하고 무차별적인 스카우트 제의를 중소형사 시니어 애널리스트를 대상으로 날리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다. 대우도 파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풍문이다. 중소형 리서치센터 소속이면서 베스트 애널리스트 반열에 올라 있는 거의 모든 애널리스트가 영입대상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대형 증권사는 많은 RA를 뽑아 소모품처럼 부려먹고 중소형 증권사는 그 중 상대적으로 나은 일부를 뽑아와 애널리스트로 육성하면 다시 대형 증권사가 돈을 무기로 빼가는 악순환 고리가 고착되지나 않을까 두렵다. 게다가 금융투자분석사 제도가 시행되면서 IT, 자동차, 화학 등 현업에서 경력을 쌓고 애널리스트가 되고자 하는 인력을 뽑아 애널리스트로 키우는 일도 더 어려워져 중소형 증권사의 고충을 키우고 있다.

 

 대형 증권사든 중형 증권사든 영업에 집중 활용하는 애널리스트는 대여섯 명에 불과하다. 모든 애널리스트를 베스트로 채우면 좋겠지만 엄청난 투자가 필요하고 투자대비 이익을 계산한다면 비록 대형 증권사라 하더라도 분명히 과잉투자이다. 그리고 무리하게 애널리스트를 영입하면서 올린 몸값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다시 부담으로 돌아온다. 과거에도 무리하게 애널리스트를 영입했다가 큰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해 비난을 받은 사례가 있다. 일부 베스트 애널리스트를 영입하더라도 나머지는 자체적으로 육성하는 대형 증권사 리서치센터의 의식 및 전략 변화를 촉구한다. 아울러 당장 눈앞의 잇속이 아니라 보다 긴 안목에서 고객과 투자자에 대한 신뢰와 의리를 먹고사는 애널리스트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